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사의의 난 (문단 편집) == 결과 == 조사의의 난은 한 국가의 존위를 훼손하는 군사반란이라는 큰 일임에도 공신, 외척 숙청에 광분했던 [[태종(조선)|태종]]답지 않게 그리 큰 처벌을 하지 않는다. 뭣보다 건국 초기라 기틀을 확실히 잡을 필요성 때문에라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잔혹하게 때려잡아야 마땅한 시기였음에도[* 실제로 건국 초기에는 반란이 일어나면 유독 심할 정도로 처참하게 때려잡는게 기본이었고, 이는 왕을 위협할 수 있는 합법적인 힘을 지닌 [[개국공신]]들에게도 다를 바 없었다. 특히 조선과 비슷한 시기 건국한 대제국 [[명나라]]의 [[홍무제]]와 [[영락제]]는 군대를 이끌고 직접 선봉에 서서 전쟁하며 유독 더욱 잔인하게 군사반란을 진압하고 [[공신]]과 적군들을 대학살해댔다.] 말이다. 구족을 멸할 정도의 대죄인 [[역모]]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군사반란 주도자 [[조사의]]와 그의 아들을 포함 16명만을 처형한다. 특히, 태조의 측근이자 태조를 따라 동북면으로 갔다가 군사반란에 참여하게 된 정용수, 신효창, 그리고 동북면의 군사 지휘권을 갖고 있었음에도 난에 참여했던 박만 등에겐 매우 관대하게 처벌한다.[* 심지어 이 중 신효창은 훗날 [[손녀]], 외손녀, 증손녀가 모두 [[세종(조선)|세종]]의 [[며느리]]가 되면서 왕실과도 사돈을 맺는다.] 이때의 기록은 [[태종실록]]이 아닌 [[세종실록]]에 나오는데, 세종 즉위년 10월 28일자 기사를 살펴보면 "상왕(태종)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, '박만은 성품이 물러서 태상(태조)의 명을 어길 수 없었을 것이며, 또 박만 등의 일을 어찌 일일이 법대로만 할 수 있겠느냐' ..."라는 대목이 나온다. 태종 당대의 기사엔 나타나지 않으나, 내용에 '상왕이 말하기를' 이라고 적혀 있는 바, 태종이 직접 조사의의 난에 태조가 가담했음을 시사한 것이다. 위 기사와 태종의 난 가담자들에 대한 태도, 그리고 난이 일어날 당시의 태종의 친정 과정 등을 볼 때, 조사의의 난이 태조가 주도한 것임은 거의 틀림없어 보인다. 결국 조사의의 난을 토벌함으로써 태종은 [[왕자의 난]]을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자신의 왕위계승과 여말선초의 혼란을 극복하고, 이후 5백년을 이어갈 조선 왕조의 기틀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해낸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